화당이 매일신문에 연재한 글입니다.
Total : 17
-
90 평생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노인네다. 평생을 일에만 빠져 앞만 보고 살았던 사람이다. 나보다 열성적이고 훌륭한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편 겸연쩍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내 삶의 대부분은 이 고장과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역동적인 순간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우민한 글이 비록 보잘 것 -
나 어릴 적에…
나는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917년, 경남 밀양군 무안면 성덕리에서 태어났다. 3남1녀중 3째로 위로는 3살 터울이 지는 형이 둘, 아래로 11살 아래인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시는 인자한 분이셨으나, 어머니는 강직한 성품으로 자식들이 어긋날라치면 곧잘 혼쭐을 내셨다. 형제들 중에 큰 형은 이북에 있어 -
19살의 현장소장
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아버지가 보증을 섰던 작은아버지의 미곡투자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져 갔다. 당시에는 미곡투자사업이 성행했다. 하지만 천수답(天水沓) 농업이란게 그렇듯 투기적인 성격이 짙었다. 앞날이 어찌될지 불투명할 때 당시 경주-감포간 도로공사를 하청받아 공사를 하시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의 도 -
만주에서 진해까지
1939년, 내 나이 스물 둘 되던 해 만주로 건너가서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까지 6년간 봉천(지금의 심양)에 있는 건설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주로 도로 공사를 맡아 했는데, 돈벌이도 괜찮았다. 봉천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자 집안에서는 나를 장가 보내려고 성화였다. 1943년 잠시 대구로 와서 사촌 여동생의 소개로 선을 봤는데 나와는 7살 차이 나는 아가 -
광복의 기쁨…그리고 6.25
해방의 기쁨을 나눈 것은 잠깐 동안이었고 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무렵, 주요 산업 시설은 부산의 고무 공장, 흥남의 시멘트, 비료 공장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일본이 침탈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 쯤으로 여겨 철로와 도로 건설만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10월 1일, 삼화토목이 설립되었고 나는 -
전쟁은 깊은 상흔을 남기고
6.25가 터지자 서울은 이내 함락되었고, 전세(戰勢)는 나날이 불리해져 갔다. 그 때, 동인동 우리 집은 서울 지방 건설국 사무실 겸 숙소로 이용되어 우리 식솔들과 처외조모, 평해교 공사 감독을 비롯한 건설국 직원들이 같이 살았다. 백 리도 못 되는 영천과 다부동 전투에서는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이 계속되었고,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었다', ;대구가 -
화성산업이 태어나다
앞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1945년 10월 1일 설립된 삼화토목(三和土木)은 이듬해에 나를 포함한 3명이 출자하면서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해방이 되고 서너 해 지났을 즈음에는 왜관교 개수 공사로 윤치영 초대(初代)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아 이름을 알리더니, 몇 해 지나지 않아 대구·경북 지역의 도급 공사 중 60% 이상을 맡아서 하는 영남 지역 최고의 건설 -
건설의 가치를 배우다
예로부터 “治水는 나라의 根本”이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60년대초 까지만 해도 해마다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 겪는 등 하늘만 쳐다보고 하는 농사로 보리고개 때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는 이러한 천수답 농업을 탈피하기 위해 수리시설 개량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누가 나에게 이승만 정부에서 잘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치수사업이라고 -
화성산업 창업 1년 만에 닥친 위기 - 사라호 태풍
화성산업은 창업시부터 울릉도 도동, 저동항 방파제 공사를 하고 있었다. 회사의 기틀을 차차 잡아가던 중, 창업한 지 꼭 1년이 되던 1959년 9월, 엄청난 시련과 위기가 찾아왔다. 우리나라 기상 관측 사상 가장 큰 태풍이었던 사라호가 덮친 것이다. 수 많은 농경지가 유실되고, 도로, 교량 등 재산상의 손실은 물론 사망·실종자가 8백 40여 명, 이재민이 -
해운업 진출과 좌절
울릉도 도동, 저동항을 비롯한 동해안 각 항구의 방파제 공사를 계기로 장비와 자재를 실어 나르기 위한 선박이 필요하였다. 특히, 울릉도 항로는 위험 부담이 높았고, 운임의 과다 지출도 문제가 되어 작은 선박보다는 대형 선박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원도 도경으로부터 1백 20톤급 쾌속 운반선인 ‘응호(應號)’를 구입하였다. 그동안 공사를 해서 벌어 둔 돈으로 -
새로운 도전 - 유통업 진출
토목공사를 주로 맡아 하던 차에 1971년 동문동 교동 상가 아파트 건축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사를 하고도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여 공사 대금 대신 대물(代物)로 건물을 넘겨 받게 되는데 그것이 유통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은 일인데다가 당시의 대구 경제 규모로는 애초에 분양을 기대할 수 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직 -
시련을 딛고 일어서다
동아백화점 건축 공사를 하기 전에 주로 토목공사를 했다. 토목공사는 관급 공사라서 자금 회전은 잘되었는데 건축 공사는 공사 금액은 몇 십배, 몇 백배 큰 공사라 하더라도 돈을 제때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동아백화점 건축 공사도 그런 경우였다. 공사를 하고서도 받지 못한 공사비 등이 1억 6천여 만원 이었는데, 회사의 사활이 걸릴 만큼 큰 금액이었다. 공사 -
사업확장과 기업 공개
1984년 12월 15일, 단일 상가로는 당시 지방 최대 규모였던 동아쇼핑센터가 덕산동에서 개점 되었다. 그 곳은 이전부터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경기 침체로 개발이 부진하여 오랫동안 불량 지구로 방치된 지역이었다. 도심의 중심 상권에서 다소 떨어진 지역이었으며, 또한 이전에 남일동이나 향촌동에 재개발사업으로 들어섰던 다른 회사 백화점이 실패했기 때문 -
지역사회와 고락을 함께 하며
기업은 그 고유의 경제 활동을 통해 재투자와 성장을 이루고, 고용 창출과 개인 소득을 증진하는 등의 선순환 구조를 가짐으로써,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과 같이 지역이 어려울 때 일수록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지역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구전시컨벤션터(EXCO) 야경 ] 화성은 예전부터 지역 또는 국가적으로 꼭 -
IMF 위기를 극복하다
1997년 12월,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회사는 당시 수성점, 칠곡점 등 백화점을 잇따라 출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견실한 경영을 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구 종금 사건이 터졌다. 역외 모 업체가 지역 산업 발전을 위해 설립된 대구 종금 인수를 꾀한 것이다. 그 -
나눌 수 있는 보람
지금은 기업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 앉았지만, 돌이켜 보면 어느 기업도 개인 규모로 창업하였으나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이미 한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자산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경영자는 선의의 관리자로서 기업의 사회적 자산 가치를 높이는 일에 그 책무가 있다고 할 것이며 자라나는 우리 후세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도 같이 해 -
넘치는 사랑에 감사드리며
나는 회사와 더불어 보낸 지난 60년 간 충분히 행복했다. 그 긴 여정에 나는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으며, 때로는 좌절의 쓴 잔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친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누가 말하기를 “경영자란 한 손에는 물뿌리개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비료를 들고 꽃 밭에서 꽃을 가꾸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직원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