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당 이윤석

칼럼
19살의 현장소장 2023-07-15

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아버지가 보증을 섰던 작은아버지의 미곡투자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져 갔다. 당시에는 미곡투자사업이 성행했다. 하지만 천수답(天水沓) 농업이란게 그렇듯 투기적인 성격이 짙었다. 앞날이 어찌될지 불투명할 때 당시 경주-감포간 도로공사를 하청받아 공사를 하시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었다.


[ 일제 강점기 때의 도로 포장 공사 모습 ]


건설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고, 내 나이 15세가 되던 해였다.

낮에는 작은 아버지를 대신해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거나 측량 보조를 했고, 밤에는 장부 정리를 하였다. 그렇게 2년여 동안 현장 실무를 익히니 어떤 공사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7살에 정식 직원으로 건설 회사에 입사하게 되는데, 당시로는 큰 금액인 30원을 월급으로 받았었다. 당시 노무자들 하루 임금이 50전 정도였으니 꽤 큰 돈이었다. 그 후 직지 사천 제방 공사, 김천-대신간 경부선 복선 공사 등 굵직 굵직한 공사에 참여하거나 직접 맡아서 해보기도 하였다.

  일의 체계가 없던 시절에 난 어떻게 하면 보다 계획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심을 했고, '남의 일이 아닌 나 자신의 일이다' 라는 생각으로 억척스럽게 일 욕심을 냈다. 이런 나의 모습들이 인정을 받았던지, 1936년 대구에 본사를 둔 건설 회사에서 현장 소장직을 맡아달라고 했다. 내 나이 19세에 현장 소장으로 발탁되게 된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현장 소장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당시에도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다른 이가 부러움에 시기할 법도 하였으나 표를 내지는 않았다. 그 당시 현장 소장이란 위세가 대단한 자리여서 함부로 대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다른 데 가서는 죽도 옳게 못 얻어 먹는 사람들이 천지였으나, 잡일이라도 현장일을 하는 사람들은 삼시 세 끼 밥은 물론 술도 한 두잔 씩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이란 거친 사내들의 세계였지만 끈끈한 정은 유별난 곳이었다. 산골오지의 공사를 할 때에는 몇 달씩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면 처자식보다 더 정이 들기도 한다. 당시의 건설현장 체계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험이 한 평생 살아온 길에 큰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때 첫 현장소장으로 한 공사가 의성군 단촌면 후평리에 위치한 저수지 축조 공사였다.

  농사 짓는 것만 보고 자란 나에게 건설 현장이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길이 닦여지고, 다리가 세워졌으며, 건물이 들어섰다. 고생고생 끝에 완성물(完成物)이 세상에 떡하니 나타나는 날이면 희열과 환희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한 정복자가 전리품을 보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뜻 밖에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떠밀리다시피 건설 현장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오히려 오늘의 나를 있게 할 줄 어찌 알았으랴? 만일 그때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천북면 어느 산골에서 촌부(村夫)의 삶을 살아 왔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