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당 이윤석

칼럼
해운업 진출과 좌절 2023-07-08

울릉도 도동, 저동항을 비롯한  동해안 각 항구의 방파제 공사를 계기로 장비와 자재를 실어 나르기 위한 선박이 필요하였다. 특히, 울릉도 항로는 위험 부담이 높았고, 운임의 과다 지출도 문제가 되어 작은 선박보다는 대형 선박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원도 도경으로부터 1백 20톤급 쾌속 운반선인 ‘응호(應號)’를 구입하였다. 그동안 공사를 해서 벌어 둔 돈으로 자재를 실어 나를 배를 구입했을 뿐인데, 나는 주변에 아주 돈 많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서 사업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게 중에는 사기꾼들도 더러 있었다. 이러한 때에 부산 해운 항만청에서 2천만 원을 지원하겠으니, 어업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회사로서는 자체 자본 없이도 다른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이를 수락하였다. 최신예 어군 탐지 레이다를 ‘응호’에 장착하고, 제주도를 비롯한 일본 근해까지 어로 영역을 확대, 어업 분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어업이 수익을 올리게 되자 부산에 사무실을 내고 원양 어업으로까지 확장해 나갔는데, 태풍 피해 복구 자금으로 받은 4천만 원의 일부를 5백 톤 급 목선 ‘안성호’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여 본격적인 해운업 진출을 시도하였다. 당시는 한일 어업 협정이 체결되기 전이라 일본과의 교역은 활발하지 않았지만, 공업용 소 뼈를 일본에 파는 것이 성행하던 때라 ‘안성호’에 소 뼈와 각종 화물을 싣고 일본을 왕래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을 갖추고 나서 시작한 사업이 아니라 계속되는 적자 부담에 골치를 앓아야 했다.



[ 울릉도 공사를 수행하던 화성(삼해)호 ]



‘응호’, ‘안성호’ 외에도 어선 5척이 더 있었는데 손실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 이 어선으로 제주도 근해에서부터 일본까지 다니며 직접 고등어잡이를 했다. 그렇게 잡은 고등어는 주로 일본에서 처분했다. 어느 날인가 우리 회사 책임자가 일본 현지에 가서 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선박이 도착하지 않았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어 급히 부산의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배들은 부산 조선소 근처에 그냥 정박해 있었다. 배에 오르니 있어야 할 선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서 열심히 고등어잡이를 해야 할 사람들이 배의 고가 장비를 훔쳐 모두 달아난 것이었다. 수산 진흥 자금 2천만 원을 받아 구입한 어선에 겨우 고등어 몇 마리만 배에 달랑 남아 있었는데 당시 부산일보 가십난에는 ‘2천만 원에 고등어 2마리’라는 기사로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선원 30명 정도를 싣고 2년여간 화물선으로 운행되던 ‘안성호’마저 일본 근해에서 폭풍으로 좌초되면서 해운업을 그만두었다. 경험의 부족, 운용 미숙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애당초 구체적인 계획 없이 의욕만 가지고 시작했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비록 실패를 맛보았지만 그것은 앞으로 경영을 하면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