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당 이윤석

칼럼
전쟁은 깊은 상흔을 남기고 2023-07-12

6.25가 터지자 서울은 이내 함락되었고, 전세(戰勢)는 나날이 불리해져 갔다. 그 때, 동인동 우리 집은 서울 지방 건설국 사무실 겸 숙소로 이용되어 우리 식솔들과 처외조모, 평해교 공사 감독을 비롯한 건설국 직원들이 같이 살았다. 백 리도 못 되는 영천과 다부동 전투에서는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이 계속되었고,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었다', ;대구가 곧 나가 떨어진다'라는 소문에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구에도 소개령(疏開令)이 떨어져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자전거 뒤에 모기장과 쌀 한 말을 싣고 앞에는 큰아들 인중(現 會長)과 딸 명은을 앉혔다. 집사람은 우리 재산이 든 가방을 들고 둘째 아들 홍중(現 社長)을 업고 뒤를 따랐다. 얼마 뒤, 우리 가족들은 피난민들에 휩쓸려 뿔뿔이 흩어졌다. 인파에 떠밀려 한참을 지나왔을 때,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 박사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대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수한다,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미덥지는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경산 어느 과수원 나무 밑에 아이들을 두고 집사람을 찾아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이야기다. 6살, 4살 어린 애들을 놓아두고, 어디서 어떻게 아이들 엄마를 찾겠다고 나섰던 지…. 하지만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들을 헤집고 왔던 길을 거슬러가다 천만다행으로 나를 찾아 헤메는 아내를 만났다. '집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전하고, 서둘러 아이들에게로 가니 어린 것들은 난리통이란 걸 알았던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당시 신천을 건너는 시내의 다리는 수성교 말고는 없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아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수성들로 해서 둘러 둘러 집으로 갔다. 논바닥을 가로지를 때에는 앞쪽에 애들 둘을 태우고 뒤에는 쌀을 실은 자전거를 어깨에 메었다. 어떻게 내가 그 무게를 이겨내었던지… 발이 푹 푹 빠져 한 발짝 디디기가 천 근 같았다. 집에 오니 피난 길에 데리고 가다 잃어버린 개가 언제 왔는지 꼬리를 치며 반겼다.


[ 도강공사로 가설된 교량을 통해 군인들이 낙동강을 건너는 장면(자료사진) ]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경상북도에서는 몇 개의 건설대가 조직되었다. 나는 건설 대장으로 그 중 하나를 맡았다. 인부와 식량, 몇 안 되는 공구를 트럭 5대에 싣고 안동교 복구 공사를 하러 떠났다. 영천 신령 고개를 지나는 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주위를 보니 폭격을 당한 북한군의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안동교에 도착하니 다리 밑에도 강바닥에도 시체가 나 뒹굴었다. 비가 내리면 물이 불어 떠내려 가겠지만, 일단 시체를 강바닥 모래에 파 묻어 주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자재가 지급되지 않아 복구도 못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도청에서 미 24공병단이 발주하는 공사를 추천하였는데, 도개~낙동간 낙동강 도강 공사였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전쟁 복구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당시 시공된 상주 이안교, 문경 영강교 등은 오늘날 까지도 사람들이 오가는 교량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