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산업이 태어나다 2023-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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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1945년 10월 1일 설립된 삼화토목(三和土木)은 이듬해에 나를 포함한 3명이 출자하면서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해방이 되고 서너 해 지났을 즈음에는 왜관교 개수 공사로 윤치영 초대(初代)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아 이름을 알리더니, 몇 해 지나지 않아 대구·경북 지역의 도급 공사 중 60% 이상을 맡아서 하는 영남 지역 최고의 건설업체로 부상하였다. 당시에는 전쟁복구 공사가 주류였는데, 완벽한 시공보다는 빠른 공사가 우선인 시기였다. 미군 측이 추천 발주한 공사를 할 때였는데,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는지 완벽하지 않더라도 빨리 끝내 주기를 재촉하였다. 하지만 공사를 책임진 나는 허술하게 처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독촉하는 감독관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런 나의 고집은 나중을 위해서라도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그렇게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했던 것 같다. [ 좌 - 지금은 당시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창업시절 동인동 구 사옥자리(현 동인로타리 부근) / 우 - 화성산업 심벌마크 변천사 ] 1956년부터 나는 3인의 공동대표 중 최연소자로 회사를 이끌게 되는데, 그 즈음에 삼화토목은 전국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업체로 성장해 있었다. 겉으로는 하나의 회사였으나 실상은 3명의 설립자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동업 체제로 경영하고 있었다. 각각의 능력과 책임으로 수주하고, 또 시공하는 독립된 회사의 연합체였는데, 삼화토목 전체 외형의 80% 이상을 내가 수주하여 주도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회사가 각각의 사장들에 의해 운영되다 보니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일의 능률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때에 건설업법이 개정 예고되었는데, 해방 이전 60여 개였던 건설 회사가 전쟁 복구 공사 등의 물량 증가로 1950년대 후반에는 1,700여개로 난립되어 합리적인 경쟁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공사 규모별로 입찰을 제한하게 되는데, 지금의 시공 능력 평가와 비슷한 제도라 할 수 있겠다. 공동 운영의 한계를 절감하던 차에 그렇게 법이 개정된다 하니 더더욱 별도의 회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소규모 회사에서 인수 의사를 타진해 왔고 이를 수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1958년 9월 1일 자본금 1천 30만원으로 세상에 태어난 화성산업(和成産業)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동인동 집을 사무실로 같이 쓸 만큼 조촐하게 시작했지만, 오래 오래 발전이 지속되기를 염원하며 和成 이라는 상호를 정하였다. 훌륭하고 뛰어난 개인이 둘이 되고 셋이 될 때 더욱 번성을 이루듯이, “和”(조화롭고 화목하게)와 “成”(이룬다) 따로 떨어진 각각의 의미도 내포하는 뜻이 깊고 좋은 단어이지만 붙였을 때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바람과 가치를 담고 이름 지어진 “和成”이 세상을 조화롭고 화목하게 이루어 나가는 밀알이 되어 언제나 그 역할을 다하는 기업으로 남겨지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