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의 가치를 배우다 2023-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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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治水는 나라의 根本”이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60년대초 까지만 해도 해마다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 겪는 등 하늘만 쳐다보고 하는 농사로 보리고개 때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는 이러한 천수답 농업을 탈피하기 위해 수리시설 개량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누가 나에게 이승만 정부에서 잘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치수사업이라고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초대정부(初代政府)는 치수사업에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국가 산업의 거의 전부가 농업이었고 따라서 건설 공사의 8, 9할은 농업 토목이었다. 화성도 저수지 등 농업 토목에 주력했다. 그런데 저수지 공사는 많은 전답이 수몰되어야 함은 물론, 수세(水稅)징수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는 게 태반이어서 공사를 수행하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히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천군 임고면 사동 저수지 공사였다.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졸지간에 가옥과 전답을 수몰시켜야 하는 임고 주민들의 반발이 극에 달해 현장에 드러 눕기도 하며 공사를 못하게 하는 등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참으로 당혹스러운 노릇이었다. 주민들이 과격한 행동을 할 때에는 경찰이 와서 연행해 가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반발을 부추기기도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직접 부딪혀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임고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설득하면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요즈음도 공사 현장은 각종 민원으로 애로 사항이 많겠지만, 당시의 농민들은 세상이라도 바뀌듯이 반대가 심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겨우겨우 설득해 주민들의 마음을 돌리고 나서야 공사를 할 수 있었는데, 저수지 공사가 완공되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임고 주민 중 유지 몇몇이 나를 찾아와 유공비 제막식을 하는데 참석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했던 공사가 너무 힘들었던 탓에 썩 내키지도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마음고생 시키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러는 게 믿기지가 않아 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쯤 지나서 우연히 그 곳을 지나치게 되어 가보니 내 이름이 새겨진 유공비(有功碑)가 진짜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영천 임고 사동저수지 축조공사를 기념하여 지역주민들이 세워 준 유공비 ]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저수지가 없던 때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어 빈농을 면치 못했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방해했던 저수지 공사가 완공되고 나서는 물 걱정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마을 전체가 부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나에게 유공비 제막식에 참석하기를 요청하였는데 내가 미처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일은 건설인으로 살아가는 참된 의미와 보람을 다시끔 느끼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그 곳이 내가 일상에 지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마음을 새로이 다잡으려 찾는 장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