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당 이윤석

칼럼
광복의 기쁨…그리고 6.25 2023-07-13

해방의 기쁨을 나눈 것은 잠깐 동안이었고 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무렵, 주요 산업 시설은 부산의 고무 공장, 흥남의 시멘트, 비료 공장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일본이 침탈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 쯤으로 여겨 철로와 도로 건설만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10월 1일, 삼화토목이 설립되었고 나는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내가 맡은 첫 공사는 대구-부산간 국도 보수공사로 경산부터 경상남·북의 경계가 되는 유천교까지 14공구의 교량 복구 및 도로 보수 공사였다. 그 후에도 여러 공사를 맡아서 했는데 특히 문경 점촌 지역의 은성 탄광 철로 복구 공사는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한 것 같은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감시자가 있어 벌목이 엄격히 통제되었지만, 해방이 되고 관리가 소홀하자 산의 나무는 땔감으로 무분별하게 벌목되었다. 산이 점점 황폐해져 가자, 각 처에서 무연탄 개발을 서둘렀는데, 경상북도도 일제 때 채굴하다 폐광이 된 문경 은성 탄광을 복구하기 위해 탄(炭) 운반용 철로 공사를 긴급 공사로 발주하였다. 이 공사를 수주 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사 기간을 단축하여 산림 훼손을 막고자 했고, 주야를 가리지 않은 공사 끝에 계획보다 2개월이 앞당겨진 14개월 만에 공사를 완공하였다. 건설로 인해 자연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였고 이 나라 산림 녹화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 은성탄광을 비롯한 문경지역의 무연탄을 싣어 나르던 철로 ]


  1946년 10월 2일, 은성 탄광 철로 복구 공사를 마치고 새벽녁이나 되어서 일행과 대구에 도착하였다. 원대 파출소를 지날 때, 파출소 창문은 깨어지고 주변은 엉망이었다. 거리에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이상하게 여겼는데 대신동 네거리에 다다랐을까, 갑자기 미군 헌병 차량 2대가 앞뒤로 가로 막아서더니 우리 일행을 경찰국으로 끌고 갔다. 그때는 죄 없이 끌려가 죽어도 어디 하소연 할 데가 없던 시절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0월 1일, 대구 사건이 일어났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쳐 시내가 통제되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 도구를 실은 트럭이 시내를 지나치고 있었으니,  폭도로 오인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는 형사를 만나 트럭은 놓아두고 그 날 오후에 풀려났는데, 밝은 낮에 본 대구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울진 평해에서 250m 교량 공사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을 즈음, 6.25가 터졌다. 북한군들은 휴전선으로만 침범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 해서 울진 쪽으로도 상륙했다. 전쟁이 터진 다음 날, 비행기에서 쏘아 대는 총알을 피해 다리 밑에서 숨죽이고 있을 때 한 직원이 흐르는 땀을 피로 착각해 살려 달라 소리쳤다.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그 난리통에도 전부 배를 잡고 웃었다. 공사용 트럭이 3대 있었지만 군에 징발되어 하는 수 없이 포항까지 걸어왔고, 그 곳에서 간신히 기차를 타고 대구로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이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