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만주에서 진해까지 2023-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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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내 나이 스물 둘 되던 해 만주로 건너가서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까지 6년간 봉천(지금의 심양)에 있는 건설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주로 도로 공사를 맡아 했는데, 돈벌이도 괜찮았다. 봉천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자 집안에서는 나를 장가 보내려고 성화였다. 1943년 잠시 대구로 와서 사촌 여동생의 소개로 선을 봤는데 나와는 7살 차이 나는 아가씨였다. 첫눈에 호감을 가졌으나 그쪽 집안에서 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건설 현장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친 피부 탓에 나이도 더 들어 보이고 생김새도 볼품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일도 바쁜 터라, 인연이 아니겠거니 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아가씨 모친이 기별도 없이 만주로 찾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사는 모습을 몰래 엿보고 나서 결혼 승낙을 결정하려 했다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럴 듯하게 보였던지, 그런 후에야 결혼을 승낙하였다. [ 당시 여학생들의 소풍 모습 (앞줄 가운데가 아내) ] 혼인을 하고 만주에 신접 살림을 차렸지만, 한 달에 20여 일 넘게 현장에서 먹고 자고 했다. 낯설고도 먼 이국 땅, 특히 만주의 척박한 겨울 날씨는 뼈 속까지 얼게 하였다. 몹시 추운 겨울에는 영하 35도 정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데 코가 어는지, 귀가 어는지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봄이 되어 따뜻해지면 코로 귀로 진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때서야 동상에 걸렸던 것을 알았다. 힘든 생활에도 집사람은 별 내색도 없이 오히려 현장일에 지친 나를 위로하며 격려했다. 동인동 시절까지 집이 회사였고, 회사가 집이었다. 현장일로 바쁜 나를 대신해 입찰 내역서를 만들고, 돈을 셈하는 역할도 그 사람의 몫이었다. 인부들 세 끼 밥도 집에서 해댔다. 깜깜한 밤중에 일어나 인부들 새벽 밥을 지어 먹이고, 도시락까지 지참시켜 각지의 현장으로 내보냈다. 나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인지라 고생하는 집사람을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다. 먼저 가버린 아내를 생각하면 좋은 남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1945년 7월 20일, 귀국(歸國)을 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징용 뿐이었다. 징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진해 해군 군수 기지 공사 현장 소장을 맡았다. 8월 15일 아침, 터널 공사에 필요한 화약이 지급되지 않아 어찌 된 영문인지 간부에게 확인하러 갔는데, 이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해 도대체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며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러던 중 정오가 되자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해방이었다. 다음 날, 짐을 대충 챙겨 대구로 올라왔다.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 난 그렇게 8.15 광복(光復)을 맞이하였다. |